2023-03-10
<천재, 리처드 파인만의 삶과 과학>
천재는 메모장이 필요 없어 보인다. 머리가 좋아서 생각으로만 모든 것을 처리할 것 같다. 하지만 천재도 메모를 많이 한다는 사실을 리처드 파인만의 일화를 통해 알게 되었다.
노벨상 수상자인 물리학자 파인만에게 있었던 일이다. 그를 인터뷰 하기 위해 역사학자 한 명이 파인만의 지하 연구실에 들렀다. 역사학자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책상 위에 놓여진 파인만의 노트를 발견했다. 그리고 무심코 이렇게 말했다. “매일 매일 연구를 기록하신 노트군요.”
그러자 파인만이 날카롭게 반응했다. “기록이라기 보단, 저는 그 위에다 직접 쓰면서 연구를 했습니다.” 역사학자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물었다. “그러니까, 연구는 머릿속으로 하신 거잖아요? 그리고 이건 그 기록이고요.”
파인만이 다시 얘기했다. “아니요, 정말로 ‘기록’이 아니라니까요. 그건 연구 그 자체입니다. 당신도 연구할 때 종이에 써야 하죠. 이게 바로 그 종이입니다.” 실제로 파인만은 엄청나게 많은 메모를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들을 종이에 적어 연구실에 수북히 쌓아두었다고 한다.
리처드 파인만은 생각을 끝내고 나서 그 생각을 기록하기 위해 메모를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생각을 하는 순간 순간 메모를 했다. 메모가 생각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사실을 파인만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노트가 “기록”이 아닌 “연구 그 자체”라고 명확하게 꼬집은 것이리라.
왜 실시간 메모가 생각을 정리할 때 도움이 될까? 내가 생각해본 두 가지 뇌과학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하루에 엄청나게 많은 생각을 하지만, 대부분은 우리가 하고 싶어서 한 생각이 아니다. 감각기관으로 들어온 자극에 대해 뇌가 자동으로 생각을 떠올린 것이다. 사과를 보면 자동으로 사과의 향과 맛이 기억난다. 정보가 뇌를 자극하고 관련된 뉴런이 반응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동으로 반응하는 것을 뇌의 조건반사라고 하는데, 이 원리가 메모를 통한 생각 정리에 유용하게 사용된다. 생각을 한 줄이라도 글로 적어보자. 그러면 조건반사적으로 다음 생각이 떠오른다. 예를 들어, 나는 일이 잘 안 풀릴 때 현재 상황을 글로 적는다. 그러면 현재 상황이 눈 앞에 보이게 되고, 관련된 문제들이 자동으로 떠오른다.
떠오른 문제들을 또 다시 글로 적는다. 그러면 이번엔 “이 문제의 원인은 뭐지?”, “이 원인을 해결하는 방법은 무엇이지?” 하는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떠오르게 된다. 마치 고구마를 땅에서 뽑을 때 처럼 생각이 우수수 딸려 나온다. 생각을 눈에 보이게 하는 것만으로도 이런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만약 문제를 머릿속으로만 골똘히 생각한다면 어떻게 될까? 인간 뇌의 한계 때문에 생각은 거의 제자리를 머물게 된다. 인간의 뇌에는 정보를 잠시 기억해두는 메모장이 있는데, 이 메모장은 많아봤자 7개 까지의 정보만 적어둘 수 있다. 다양한 생각을 하기에는 금방 동이 나버리는 용량이기 때문에, 생각은 결국 뺑뺑이를 돈다. 이때 생각을 종이에 적으면 기억해야 하는 부담이 줄어들어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
뇌는 커다란 문제를 가지고 있다. 모르는 것도 안다고 착각한다는 점이다. 충분히 잘 아는 분야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누군가에게 설명을 하려고 하니 말문이 막힌 경험이 있을 것이다. 사실은 그 분야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뇌가 스스로를 과신하기 때문에 이 사실을 깨닫기는 어렵다.
우리는 왜 과신하는 뇌를 가지게 되었을까? 진화심리학적인 이유가 있다. 원시시대 때, 뇌는 위협 상황을 대처하기 위해 관련 기억을 빠르게 떠올릴 수 있어야 했다. 이렇게 생사가 달린 급박한 상황에서 기억의 세부사항은 조금 틀려도 상관 없었다. 생존에서 필요한 것은 지금 당장 무엇을 할지와, 그에 따른 예상 결과였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행동파” 뇌를 갖게 되었다.
이런 본능이 존재하는 이상 머릿속에 있는 생각은 엉터리일 확률이 높다. 이 생각을 완성도 있게 가꾸려면, 그냥 메모를 하면 된다. 생각이 뇌 밖으로 꺼내져서 “외부 세계”가 되는 순간 논리력이 발동해서 맞고 틀림을 따질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자신보다는 남의 장단점을 더 쉽게 파악하는데, 이것도 논리력이 외부 세계에 더 잘 작동하는 예시이다.
메모 또는 글쓰기로 자기비판을 해본 경험을 공유해보겠다. 나는 우리 회사의 기술 팀 리더로서 많은 면접을 봤다. 면접의 마지막에는 항상 지원자가 나에게 질문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데, 어느 날 지원자가 이렇게 물었다. “이 팀의 장점을 알려주시겠어요?”
‘장점? 엄청 많지. 우리 팀은 최고라고. 나는 그걸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해왔어.’ 이렇게 생각하며 나는 입을 열었다. “저희 팀 엄청 좋아요. 일단 팀원들 다 착하고, 잘하고, 음… 복지도 좋습니다.” 전혀 만족스럽지 않은 대답이 나와서 나는 깜짝 놀랐다. 지원자에게도 마찬가지였는지, 우리는 그 지원자를 놓쳤다.
면접 때 내 모습에 실망한 나는 우리 팀의 장점을 곧바로 글로 작성해봤다. 그랬더니 역시 엉터리 수준의 글이 나왔다. 우리 팀에 대해 이 정도 밖에 이해하지 못한채로는 지원자를 유혹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리더니까 팀에 대해선 다 알고 있다”는 것은 뇌의 강력한 속임수였다.
속임수를 깨고 나온 나는 논리력이 발동되어 내 생각을 고쳐갔다. 우리가 잘하는 부분은 왜 잘하는지, 얼마나 잘하는지 같은 질문을 통해 논리를 보강했다. 잘한다고 “느꼈”지만 실제로는 못하고 있는 부분도 발견했다. 또, 역지사지를 통해 지원자 입장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이 무엇인지도 골라낼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우리 팀 어필 포인트”라는 문서를 만들 수 있었고 면접에서 두고두고 잘 써먹었다. 우리 팀에 대한 나의 이해도 역시 높아져서 팀 운영도 더 잘하게 되었다. 만약 생각을 외부 세계로 꺼내지 않고 머릿속에만 두고 있었다면, 나는 제대로된 생각 정리를 하지 못한 채로 살아갔을 것이다.
당신과 나는 파인만보다 지능이 낮을 것이다. 그런데도 메모를 파인만보다 게을리 한다면 반성해야 할 일인 것 같다. 메모가 생각 정리에 어떻게 도움을 주는지 알았으니 이제 꾸준히 실천해보자.
많은 아이디어를 얻고 싶다면 뇌의 조건반사를 이용하자. 생각을 논리적으로 정돈하고 싶다면 생각을 뇌 밖으로 꺼내서 논리의 칼을 들이대자.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머리가 좋아지는 것은 덤이다.